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베네치아 리도섬 극장 주변에 설치된 ‘어쩔수가없다’ 홍보 간판. 베네치아/김은형 기자


“은사자상-감독상은… ‘더 스매싱 머신’의 베니 사프디!”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식이 나왔다. 화가 치솟았다. 지난 6일 밤(현지시각) 운 좋게도 앞에서 두번째 줄, 무려 옆자리에 드레스를 입은 수상자가 앉은 좋은 자리에서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폐막식을 지켜봤다. 감독상 다음에는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과 최고상인 황금사자상 시상이 남아있었다. 더 좋은 상이 남아있는데 설레기는커녕 화가 났던 이유는 이미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수상자 리스트에 없다는 걸 알고 폐막식에 취재하러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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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베네치아 등 주요 영화제는 시상식을 하는 폐막식 전날 또는 당일 점심까지 수상자들에게 연락을 한다. 폐막식에 참석해달라고. 그럼 해당 영화가 무슨 상인지는 몰라도 수상자 리스트에 올라갔다는 걸 알게 된다. 박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로 베네치아 경쟁 부문에 갔던 2005년, 여행하던 중 폐막식 참석 요청을 받고 서둘러 돌아와 특별상을 주식계좌
수상했다. 따라서 폐막식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오지 않으면 수상 못한다는 의미다. 2019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경쟁 부문에 올랐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직원의 소통 실수로 폐막식에 초대받은 줄 알고 기대에 차 갔다가 호명받지 못하고는 한동안 표정 관리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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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전 수상자 명단을 미리 알 수 있다. 폐막식 참가자들이 직전에 레드 카펫을 밟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날 레드 카펫을 보면서 짐 자무시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나 카우사르 벤 하니야의 ‘힌드의 목소리’ 둘 중 하나가 황금사자상을, 다른 하나가 심사위원대상을 가져갈 것으로 예상했다. 둘 다 작품성으로나 화제성으로나 많은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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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두 상과 함께 3대 하이라이트인 감독상은? 수상할 만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 한참 머릿속 회로를 돌리는데, 감독상에 호명된 이가 베니 사프디라니…. ‘더 스매싱 머신’은 올해 공개된 경쟁 부문 작품 가운데 평이 좋지 않은 작품군에 속했다. 미국 종합격투기 대회 UFC의 전설 마크 커를 다루는데, 디테일은 뭉툭했고 톤은 미적지근한데다주식명인
현존하는 인물을 다뤄서인지, 그의 약점이나 그림자는 거의 다루지 않아서 밋밋한 넷플릭스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외신들의 평가도 비슷했다. 그러니 박찬욱 감독의 수상 불발이 더 서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가 열리던 기간 베네치아 본섬의 산마르코 광장 앞 건물에 걸려있던 짐 자무시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대형 홍보 현수막. 베네치아/김은형 기자


영화제는 올림픽이 아니다. 전에도 썼듯이 정량적 평가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화제 공식 소식지는 각국 주요 언론들의 평가를 모아 별점을 내고, 언론은 공식 상영 때 나온 박수 소리 시간을 전달하면서 그나마 정량화할 수 있는 수치들을 제공한다. 하지만 박수 소리와 별점은 수상과 무관하다. 수상작 결정은 심사위원단이 하기 때문이다. 심사과정이 공개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수상 못한 이유를 알 수도 없다. 이번 영화제에서 뜨거운 현장 반응과 큰 호평을 받은 ‘어쩔수가없다’가 수상하지 못한 이유 역시 알 수 없다.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알렉산더 페인의 취향과 박찬욱 감독의 이번 작품이 맞지 않았던 게 아닐까 막연히 추론해볼 뿐이다.
아쉬운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영화제 수상은 해당 영화의 해외 수출 및 흥행과 직결될 뿐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적 위상을 세계에 알리기에도 좋다. 배급사들이 영화제에서 큰 돈을 들여 광고 간판을 세우는 등 홍보에 뛰어들고, 각국 영화 관련 정부 조직도 영화제에 참석해 파티를 열거나 집행위원장, 심사위원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올해 한국 영화 경쟁작이 없었던 칸영화제에는 12명이나 출장을 갔던 영화진흥위원회가 베네치아에는 단 한명도 오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내가 만든 어떤 영화보다 관객 반응이 좋아서 이미 큰 상을 받은 기분”이라고 전해온 박찬욱 감독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체감한 온도도 그랬고, 칸영화제 등을 오랫동안 현장 취재해온 기자들도 이번과 같은 관심과 열기는 처음 경험했다고 입을 모았다. 자부심을 가질 만한 자국의 좋은 영화가 국외의 까다로운 평단과 ‘씨네필’(영화광)들로부터 환호를 받는 현장을 지켜보는 건 뿌듯한 일이다.
그래서 수상 불발이 더 아쉬울 수밖에 없지만, 수상을 못했다고 작품이 발하는 빛이 바래는 건 아니다. 박찬욱 감독의 수상 불발 소식이 들리자 마치 실패를 기다렸다는 듯 ‘언론의 호들갑’이라는 비난도 들린다. 현장을 본 기자로서 동의하기 힘들다. 이번 베네치아에서의 진기한 ‘국뽕’의 경험은 영화 기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고, 앞으로도 오래 마음속에 남을 것 같다.
베네치아/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