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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선예림
- 25-08-11 20:53
- 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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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제가 대학 4학년이었던 1990년이었습니다. 당시 농촌과 도시빈민촌 등에서 진행했던 대학생들의 농활(농촌활동)과 빈활(빈민활동)처럼, 기지촌 여성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여대생들은 1990년 여름 첫 기지촌 활동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경기 의정부에 있는 ‘뺏벌 기지촌’이었습니다.
미군 헌병이 밤낮으로 총을 들고 다니고 매일 미군 부대에서 수없이 많은 미군이 쏟아져 나오던 무서웠던 기지촌, 공무원들이 기지촌 여성들을 ‘위안부’라고 부르며 매주 성병을 검진하러 봉고차를 타고 나오고 성병 검진에서 떨어진 기지촌 여성들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가 일주일 만에 주택청약종합저축소득공제서류 거의 죽다시피 만들어 풀어주던 참혹했던 기지촌, 그곳에서 김애란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지난달 30일 오후 경기도 평택 송탄장례문화원에서 ‘기지촌 여성 인권운동가 고 김애란 선생님 여성장 장례위원회’가 추모식을 열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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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저희는 기지촌 여성들의 혼혈 자녀들을 돌보는 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지촌에 갑자기 나타난 대학생들은 의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골목을 지나가면 저희를 의심하거나 비하하는 목소리가 주변에서 들렸고, 깡패들과 미군들은 저희를 희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뭐 어떠냐! 얼마 예솔저축은행 나 좋은 일이냐! 그런 소리들 하지 말아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놀라서 쳐다본 곳에 환하게 웃으며 저희를 바라보는 김애란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미군 위안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한참 나중에 물으니 예쁘고 고마운 저희에게 욕하는 사람들이 미워서 한마디 했다가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저희를 볼 때마다 웃어주시던 김애란 선생님의 모 대구한국주택공사 습은 얼마 후 보이지 않게 되었고, 다시 마주친 건 동두천 ‘보산리 기지촌’에서였습니다.
1990년 의정부 기지촌서 첫 인연 고인 중심으로 여성운동가들 뭉쳐 성매매방지법 만들고 기술원 폐지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의 제1회 여성기금사업에서 1등상을 받고 문을 열게 된 새움터 공동작업 약정금 장의 기지촌 여성 한분이 미군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범인과 목격자를 찾아다니던 기지촌의 골목에서 저희를 둘러싸고 욕하던 깡패들 사이를 뚫고 들어와 저희 앞에 서서 깡패들과 ‘맞짱 뜨는’ 분을 만났습니다. 바로 김애란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 “이 사람들 하는 말 다 맞다! 죽은 여자는 내 동료야! 그리고 오늘은 내가 미군에게 죽을지도 몰라!”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다시 만난 김애란 선생님과 저희는 다시는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늘 함께였습니다.
고인(앞줄 오른쪽)의 칠순날 새움터 활동가들과 함께. 필자 제공
김애란 선생님을 중심으로 많은 기지촌 여성들과 기지촌 여성운동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뭉쳤습니다.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미군 위안부들이 겪은 일을 밝히고, 미군 범죄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내고, 참혹한 미군 범죄 피해를 견뎌내고 생존한 미군 위안부들의 일상을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너무 거대했고,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다고 저희를 일으켜줬던 분이 김애란 선생님이었습니다. 이 땅의 힘만으로 못하면 하늘에 계신 기지촌 언니들도 다 나서서 도울 거니까 용기를 잃지 말라고 했습니다. 혼자 남아도 끝까지 싸울 거고, 세상을 떠나도 계속 싸울 거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눈물을 닦고 또 나섰던 세월이 20년을 훌쩍 넘습니다.
그 사이 저희는 성매매방지법도 만들었고, 기지촌 여성들을 끌고 가 가두던 서울특별시립여자기술원도 폐지시켰으며,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청구 소송도 이겼습니다. 하지만 주한미군과 국가는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기지촌 여성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많은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국가배상청구 소송이 끝나자마자 김애란 선생님을 중심으로 기지촌 여성들이 다시 뭉쳤고, 마지막으로 주한미군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결의했습니다. 미군이 너무 두려워 직접 소송하는 걸 끝까지 망설였지만,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다들 죽기 전에 마지막 싸움을 하자고 나선 것도 김애란 선생님이었습니다.
‘위안부’ 국가배상청구 승소 이어 망설이던 주한미군 상대 소송 나서 두렵던 기억 마주하며 증언했는데 한달 뒤 갑자기 쓰러져 끝내 별세
김애란 선생님이 미군 소송을 준비하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활동은 미군 부대 안에서 벌어졌던 미군 위안부 성착취 역사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겪은 일을 증언하기 위해 저와 함께 파주 장파리의 옛 기지촌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미군 위안부들을 데리러 나왔던 미군 트럭에 대해 들었습니다. 미군이 운전하는 트럭이 다리(리비교)를 건너 미군 부대 정문 앞에 서 있는 미군 위안부들을 트럭에 태우고 미군 부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고 선생님은 증언했습니다. 그렇게 미군 부대 안으로 끌려간 미군 위안부들은 미군 부대 안에서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성적 학대를 당했고, 그중에는 미성년자도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달쯤 후 김애란 선생님은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졌고, 지난달 25일 향년 75살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활동이었던 장파리 기지촌 현장 조사 때 촬영한 옛 미군 부대 정문. 사진 왼쪽 리비교를 건너면 바로 미군 부대였고, 미군 부대에서 다리를 건너온 미군 트럭은 짐칸에 미군 위안부들을 태우고 다시 다리를 건너 미군 부대로 데려갔다고 고인은 증언했다. 필자 제공
이 운동을 당신 없이 해본 적이 없는 저희는 지금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맞는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당신에게 물을 수 없으니 과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소원이었던 주한미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꼭 해보겠습니다. 다시 만나는 날 환하게 웃으며 수고했다고 저희의 손을 잡아줄 당신을 떠올리면서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김애란 선생님, 영원히 기억하고 영원히 사랑합니다. 오늘도 당신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김현선/새움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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